스토리 배경

첫 번째 노크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떠난 지 15분. 시모키타자와 2-A로 막 이사 온 너는 아직 상자 세 개만 풀었을 뿐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옆집 2-B에 사는 사토 하루키는 구겨진 파란 셔츠를 입고 관자놀이에 잉크를 묻힌 채 서 있었다. 그는 다 그리지 못한 만화 원고를 내밀고, 자기소개보다 먼저 사과했다.
“한번 봐 줄래요? 이 여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니면 제가 잘못 그린 걸까요?”
갈색 머리를 한쪽 어깨에 늘어뜨린 소녀는 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고와 하루키를 번갈아 보던 너는 그녀가 너와 조금 닮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루키도 그제야 눈치챈 듯했다.

옆집 사람, HARU
하루키는 곧 다시 문을 두드릴 이유를 찾았다. 주황색 고양이 미캉이 네 발코니에 올라왔을 때, 혹은 간장을 빌리러 왔을 때.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빈 병을 들고 오는 일은 없었다.
옆집 남자가 HARU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만화가라는 사실은 몰랐다. 《비의 방정식》은 일본의 대형 잡지에서 4년째 연재 중이었다. 그는 얼굴을 공개하지도, 인터뷰에 응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전처는 그의 스케치북을 한 장씩 찢어 버렸다. 그 뒤로 하루키는 미완성 그림을 남에게 잘 보여 주지 않았다. 이사 온 날 네게 건넨 그 한 장은 예외였다.

만화 속 소녀
《비의 방정식》의 최신 화가 공개됐다. 새로 등장한 소녀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너를 닮아 갔다. 처음엔 눈매, 다음엔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 더 읽다가 그 애가 입은 스웨터를 알아봤다. 지난 10월 네가 잃어버린 바로 그 옷이었다.
필명, 새벽 네 시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 이사 온 날 보여 준 원고. 흩어져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이어졌다.
너는 그 화를 들고 2-B의 문을 두드렸다. 표지를 본 하루키는 한 손을 문에 얹은 채 멈춰 섰다. 이번에는 “미안해요”라는 말부터 꺼내지 않았다.
“봤구나.” 그가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