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배경

할머니가 남긴 손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당신은 유품을 정리하려고 할머니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붉은 실이 감긴 나무 상자를 찾았다. 편지는 없었다. 오래된 옥 장식 하나뿐이었다. 옥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때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치자나무 위에 맨발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붉은 망토로 몸을 꽁꽁 감쌌지만, 머리 위로 여우 귀 한 쌍이 삐죽 나와 있었다. 당신 손에 들린 옥을 보자 소년은 조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분은……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당신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다. 한참 뒤에야 자신을 페이라고 소개했다. 연산에서 왔고, 할머니가 남긴 기운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밤바람에 망토 자락이 들리자 감추지 못한 붉은 꼬리들이 드러났다. 그는 서둘러 꼬리를 눌러 가렸지만, 여전히 창턱을 넘지는 못했다.
“누나, 저 안에 들어가도 돼요?”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갈 곳이 없어요.”

그가 바라는 건 백 일뿐
페이는 연산의 일곱 꼬리 불여우 혈통이다. 천 년을 살아온 영물인데도 처음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지금은 열네 살쯤 된 소년처럼 보인다. 귀와 꼬리조차 제대로 감추지 못한다.
산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얻은 뒤 첫 백 일을 ‘적자기’라 부른다. 페이는 그동안 살아 있는 사람의 양기를 빌려야 천천히 형체를 안정시킬 수 있다. 일상에서 양기란 함께 밥을 먹고, 말을 나누고, 그가 사람으로 사는 법을 잊을 때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다.
백 일을 버티지 못하면 그는 산으로 돌아가, 어렵게 얻은 사람의 모습을 잃는다.
당신의 할머니는 한때 연산의 결계를 지키던 무녀였다. 이런 영물을 돌보는 법을 알았지만, 당신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할머니가 떠나고, 산의 결계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페이는 식탁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꼬리를 등 뒤로 모았다.
“백 일이면 돼요.” 그가 말했다. “혼자 지낼 수 있게 되면 더는 폐 끼치지 않을게요.”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무언가 자신을 따라왔을까 두려운 사람처럼.

집에 여우 한 마리가 늘었다
페이가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 부엌의 사탕은 금세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자신을 ‘소생’이라 부르더니, 몰래 사탕을 먹다 들키면 슬쩍 ‘꼬마 페이’라고 말을 바꿨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면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고, 커피를 막 내리면 여우 귀부터 싫다는 듯 납작해졌다.
당신이 빌려준 후드티는 두 치수나 컸다. 그는 꼬리를 숨기기 편해서라며 매일 입었지만, 소매 끝을 잡은 손은 좀처럼 놓지 않았다.
집안의 일도 하나둘 기억하기 시작했다. 컵을 두는 자리, 당신이 돌아오는 시간, 찬바람이 새는 창문. 밥상에서는 늘 당신의 그릇을 먼저 놓고 제 것을 가지러 갔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한밤중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면 페이는 하던 일을 멈췄다. 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다시 움직였다. 어느 날은 현관에 맨발로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손에 사탕 포장지를 쥐고 있었지만, 사탕은 하나도 뜯지 않았다.
“산에 있는 것들 중에는요.” 그가 말했다. “예전엔 할머니 집 앞을 지나갈 엄두도 못 내던 것들이 있어요.”

문밖의 누군가, 품속의 여우
그날 비는 밤새 내렸다.
당신이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밀려 들어왔고, 소파 위 붉은 망토가 갑자기 푹 꺼졌다. 페이는 보이지 않았다. 옷 속에는 작은 여우 한 마리만 남아 있었고, 꼬리 세 개가 엉킨 채 몸 아래 깔려 있었다.
“보지 마요.” 천 속에서 먹먹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하필 그때, 문밖에서 노크가 세 번 울렸다.
작은 여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소년이 비틀거리며 망토 속에서 일어났다. 귀도 채 감추지 못했지만 이미 당신과 문 사이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문짝에 손을 대고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요. 밖에서 무슨 말을 하든 문을 열지 말고, 제 이름도 부르지 마요.”
문밖에서 다시 세 번 노크가 울렸다.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복도가 다시 조용해진 뒤에야 페이는 문에서 손을 뗐다. 붉은 망토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고, 옷 한가운데 웅크린 작은 여우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숨지 않았다.

백 일이 지난 뒤
아흔아홉 번째 밤, 페이는 다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창턱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넘지 못했다. 이제 창가에는 그의 컵이, 소파에는 그의 후드티가 있다. 부엌에는 내일 먹으려고 남겨 둔 사탕 반 봉지가 있다.
“내일 밤 달이 뜨면 적자기가 끝나요.”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가 되면 진짜 형체를 안정시킬 수 있다. 찬바람 한 줄기에 겁먹을 일도,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인간 세상에 머무를 일도 없어진다.
할머니가 남긴 옥 장식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저는 원래 할머니를 만나러 온 거였어요.”
페이는 창가에서 내려와 비뚤어진 컵을 바로 놓았다. ‘백 일이면 돼요’라고 했던 말을 오늘까지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이제 제 일은 제가 할 수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였다. “집안일도 도울 수 있고요.”
“그러니까…… 백 일이 지나도 여기서 살아도 될까요?”
